집은 더 이상 사적인 곳이 아니다 (공간철학 01회)
집은 더 이상 사적인 곳이 아니다
: 지난 10년, 인테리어 공간을 둘러싼 철학적 균열
집은 오랫동안 사적인 장소로 간주되어 왔다. 일하고, 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폐쇄적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이러한 단순한 정의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다. 집은 더 이상 단순한 쉼터가 아니다. 일터가 되었고, 전시장이 되었으며, 때로는 감시와 자기 관리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변화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부터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공간’을 정말로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질서 속에서 공간을 소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인테리어 유행 분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특히 공간을 둘러싼 문제를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두 프랑스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시선은 지금의 인테리어 풍경을 다시 보게 만든다.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 1974)에서 공간을 땅이나 구조물로 보지 않는다. 그의 출발점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이다. 공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특정한 공간을 생산하며, 이 공간 속에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권력관계’를 동시에 새겨 넣는다.
르페브르는 공간을 세 층위로 나눈다. 사람들이 실제로 걷고, 앉고, 일하고, 잠자는 일상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이 있다. 이것이 ‘공간 실천’이다. 그 위에 전문가와 제도가 그려내는 ‘설계도의 공간’이 있다. 평면도, 개발 구역, 면적 기준, 용도 구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이를 ‘공간의 재현’이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 상징이 쌓여 생기는 살아지는 공간이 있다. 집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돌아올 곳’이 되는 순간, 공간은 삶의 의미를 얻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세 층위가 항상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사회로 갈수록 ‘설계와 계산의 공간’이 ‘일상의 공간’과 ‘삶의 공간’을 압도한다. 르페브르는 이를 ‘추상 공간’이라 불렀다. ‘추상 공간’은 숫자로 환산가능하고, 교환가능하며, 관리가 용이한 공간이다. 차이와 기억은 제거되고, 효율과 표준만 남는다.
이 이론은 추상적이지만, 오늘날의 주거 환경을 떠올려 보면 낯설지 않다. 평면도 속에서 집은 이미 기능별로 구획돼 있고, 사람은 그 안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권유받는다.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푸코는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지점을 파고든다.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에서 푸코가 분석한 것은 감옥이지만, 그의 관심은 특정 제도가 아니라 공간이 사람을 어떻게 행동하게 만드는가에 있다. 푸코에게 공간은 권력이 작동하는 기술이다.
그는 ‘판옵티콘’이라는 개념을 통해, 항상 감시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사람들이 스스로를 통제하게 되는 구조를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실제 감시가 아니라, 감시당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 인식은 공간의 배치와 시선 구조를 통해 작동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깔끔한 공간, 밝은 조명, 정돈된 동선은 단순히 쾌적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관리와 자기 규율을 학습하게 만드는 환경이다. 인테리어는 개인의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내면화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코는 모든 공간이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지배적 질서 속에 있으면서도 그 질서를 비껴가는 장소들에 주목했다. 장례식장, 정원, 병원, 배, 혹은 특정한 방처럼 일상의 규칙이 어긋나는 공간을 그는 ‘이질적 장소라 불렀다. 이러한 공간들은 사회의 규칙을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그 규칙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미국, 공간은 생활 방식의 연장이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지난 10년간 각 지역의 주거 공간 변화를 살펴보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미국의 경우 주거 공간 변화는 생활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다. 재택근무가 확산되자, 공간은 바로 반응했다. 거실 한쪽에 책상을 두는 차원을 넘어, 업무 공간을 분리하고, 소음과 시선을 고려해 구조를 조정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었다.
미국 사회에서 공간은 오래전부터 생활의 도구로 여겨졌다. 집은 자산이면서 동시에 일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장치다. 그래서 공간 실천의 변화가 비교적 수월하게 설계의 변화로 이어진다. 르페브르가 말한 ‘사는 공간’과 ‘설계된 공간’ 사이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작다.
일본, 공간은 몸의 문제다
일본은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일본의 주거 공간은 오랫동안 제한된 면적을 전제로 발전해 왔다. 이 때문에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보다, 어떻게 쓰고 비워두느냐가 중요했다. 가변적인 벽, 미닫이문, 다다미는 공간을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형되는 장치로 만든다.
일본의 인테리어는 시각적 과시보다는 몸의 감각에 가까운 문제다. 이것은 일본 인테리어의 핵심이다. 앉고, 눕고, 이동하는 방식이 공간의 의미를 결정한다. 이 점에서 일본의 주거 공간은 르페브르가 말한 삶의 공간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며, 공간은 사용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유럽, 공간은 시간의 층위다
유럽은 역사적 시간이 깊게 스며든 공간을 보여준다.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기보다는 새로운 기능을 덧붙이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인테리어는 기존 구조를 지우기보다 읽어내는 작업에 가깝다. 여기에 최근에는 에너지 효율과 환경 문제가 결합됐다. 단열, 환기, 재생 가능 에너지는 인테리어 선택의 핵심 기준이 되었다.
유럽에서 공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과 연결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집은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곳이면서도,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관련된 장소다.
한국, 추상 공간이 지배하는 집
한국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한국의 주거 공간은 오랫동안 아파트라는 형식 안에서 표준화되어 왔다. 설계는 이미 결정돼 있고, 개인은 그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테리어는 공간을 다시 만드는 작업이라기보다, 추상 공간 위에 이미지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이것은 한국 고급 아파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인테리어는 눈에 띄게 세련돼졌다. 그러나 이 변화가 구조적 전환으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재택근무, 1인 작업, 취향 중심의 공간 연출이 등장했지만, 평면 자체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공간 실천의 변화가 공간 재현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 인테리어는 르페브르가 비판한 추상 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푸코의 말로 바꾸면, 한국의 집은 편안해졌지만 동시에 더 규율화되었다. 깔끔함, 정돈, 미니멀리즘은 취향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점검과 비교, 관리라는 시선이 작동한다.
전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을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회복하는 장소’로 만들려는 시도는 분명히 늘었다. 작은 서재, 개인 작업실, 취향 중심의 공간은 기존 질서와 어긋나는 작은 이질적 장소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시도들은 아직 주변부에 머문다. 한국 인테리어는 지금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공간을 효율과 이미지의 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삶의 방식과 권력 구조를 다시 묻는 질문으로 확장할 것인지가 갈림길이다.
르페브르와 푸코는 공간이 결코 무해하지 않다고 말한다.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지난 10년, 한국의 인테리어는 변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이제부터다.
이러한 변화가 장식의 수준을 넘어, 삶의 질서를 다시 묻는 전회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 철거 폐기물 신난 일꾼)
['철거', '설비', '폐기물' 그리고 '보양' 올인원 서비스 업체 '신난 일꾼'의 한 사람으로서 실내 공간은 저의 노동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유의 대상입니다. 그 사유의 애씀과 작은 결실들을 저의 사유 블로그 I am YuDaeChil을 통해 하나하나 조용히 세상에 내어 놓고자 합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철학을 연구하며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이러한 고민은 '숨'과도 같습니다. '호흡'처럼 이어지는 일입니다. 관심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 '호흡'을 함께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