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유지될 수 있는가?

‘무’는 유지될 수 있는가?

(연재: 우주의 존재 이유 ― 물리학 이론 탐구 / 1편)

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가 있는가? 이 질문은 아주 오래된 물음이다. 이 질문을 지금 우리에게 기억에 남을 분명한 형태로 남긴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였다. 그는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라고 물었지만, 당시에는 이 질문에 대해 실험이나 계산으로 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랫동안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머물렀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존재 자체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질문을 대하는 과학의 태도가 바뀌었다. 물리학은 더 이상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곧장 던지기보다, 그보다 한 단계 앞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지면, 존재에 대한 설명 역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내가 아주 큰 흥미를 느낀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무'는 말 그대로 완전한 '공백'이다. 아무것도 없고, 그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다. 고전적인 과학, 특히 19세기까지 많은 학자들의 생각도 사실 이런 생각에 가까웠다. 이 관점에서 세계는 비어 있는 공간 위에 입자들이 놓여 있는 구조이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가 생기려면 반드시 외부에서 원인이 주어져야 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세계를 더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오늘날 물리학은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양자장(quantum field)’을 말한다. '양자장'은 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일종의 물리적 상태다. '전자'나 '빛'처럼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는 '입자'들은 사실 이들 '양자장'이 특정한 방식으로 흔들리거나 진동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중요한 점은 입자가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도 '양자장' 자체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자장'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를 물리학에서는 '진공'(vacuum)이라고 부른다. 단어만 보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양자장의 진공 상태'에서도 '완전한 정지'는 '불가능'하다. 자연의 기본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와 시간은 동시에 완벽하게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에는 에너지가 정확히 0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그 결과, 진공에서는 '입자'와 '반입자'(antiparticle)가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이를 '가상 입자(virtual particles)의 생성과 소멸'이라고 한다. 이 현상은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이론과 실험이 함께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물리학적 관점에서의 진공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아주 작은 변화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상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런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 1954– )는 “무는 불안정하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불안정하다는 말은 위험하거나 혼란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물리 법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과 중력(gravity)을 함께 고려하면, 공간과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과정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의 상태가 더 특별한 조건을 요구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렇게 아주 미세한 수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가 어떻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우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이론이 '급팽창 우주론'(inflationary cosmolog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처음 생겨난 직후 극히 짧은 순간 동안 매우 빠르게 팽창했다. 이 빠른 팽창 덕분에, 원래는 거의 의미 없을 만큼 작았던 진공의 요동이 우주 전체 크기로 크게 확대될 수 있었다. 작은 씨앗이 급격한 환경 변화를 만나 크게 자란 셈이다.

이 과정은 우주가 갑자기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유지되기 어려운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상태로 넘어간 결과에 가깝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의 시작은 특별한 기적이라기보단 물리 법칙이 허용하는 변화의 한 사례다.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단순한 에너지 덩어리가 아니다. 별과 은하 그리고 그 안의 물질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입자들이 질량(mass)을 가져야 한다. 질량이 없다면 입자들은 서로 모이지 못하고, 어떤 구조도 만들 수 없다. 입자들이 질량을 얻게 되는 과정에는 '힉스 장'(Higgs field)이라는 물리적 메커니즘이 관여한다. 이 문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존재가 단순한 출현이 아니라 구조를 갖춘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현대 물리학이 보여 주는 답은 생각보다 담담하다. 물리학이 정의하는 무는 애초에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며, 그 상태가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허용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존재는 설명이 불가능한 예외라기보다, 설명 가능한 결과에 가깝다. 오히려 완전한 무가 아무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는 상태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최근의 이론들은 이 질문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다. 왜 하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우주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중우주(multiverse)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는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우주의 경우가 매우 많다면, 그중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우주가 나타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우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해석이다.

또한 2024년과 2025년에 발표된 관측 연구들은 우주의 현재와 미래 역시 고정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우주의 팽창을 이끄는 암흑 에너지(dark energy)의 성질이 시간이 지나며 변할 수 있다는 점이 관측되었고, 이는 우주의 시작뿐 아니라 장기적인 변화와 종말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낳고 있다.

이처럼 현대 물리학이 그려내는 우주는 목적을 향해 설계된 이야기라기보다 가능한 상태들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결과에 가깝다. 존재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가능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시작된 우주가 어떻게 에너지의 빚 없이 성립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물질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 신난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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