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왜 ‘공짜’로 태어났는가
(연재: 우주의 존재 이유 ― 물리학 이론 탐구 / 2편)
1편에서 우리는 ‘무’라고 불리는 상태가 물리학적으로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으며, 아주 작은 양자적 요동이 우주의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읽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기 바란다. 앞으로 이에 관한 나의 글은 이 연재 이후로도 이어질 것이며, 그 글의 이야기는 계속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렇게 시작된 우주는 어떤 대가를 치렀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은하 그리고 막대한 양의 에너지와 물질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생겨났다면, 그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자연에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있다. 에너지는 만들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오직 형태를 바꿀 뿐이라는 원칙이다. 이를 '에너지 보존 법칙'(energy conservation law)이라고 한다. 바로 이 법칙에 따르면, 어떤 계에서든 전체 에너지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 항상 같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에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말은 이 기본적인 법칙을 조용히 어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는 오랫동안 우주론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였다.
이 문제에 대해 20세기 후반부터 제시된 중요한 해답이 바로 '제로 에너지 우주 가설'(zero-energy universe hypothesis)이다. 이 생각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물리학자들로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 미국의 우주론자 알렉산더 빌렌킨(Alexander Vilenkin, 1949– ) 그리고 급팽창 이론으로 잘 알려진 앨런 구스(Alan Guth, 1947– )가 있다.
이 가설의 핵심은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한쪽 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에너지는 별과 은하 그리고 물질과 빛이 가진 에너지다. 이러한 에너지는 모두 양(+)의 값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자연에는 이와 반대되는 성격의 에너지도 있다. 바로 '중력'(gravity)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중력은 물질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에너지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물리학에서는 이 중력 에너지를 음(–)의 값으로 계산한다. 쉽게 말해, 물질이 많이 모여 있을수록 중력은 더 깊은 에너지의 ‘구멍’을 만든다. 이러한 '음의 에너지'는 물질이 가진 '양의 에너지'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제로 에너지 우주 가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우주에 들어 있는 모든 물질과 빛이 가진 '양의 에너지'를 모두 더하면 엄청난 값이 되지만, 동시에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중력'이 만들어내는 '음의 에너지'를 함께 고려하면, 두 값이 서로 상쇄될 가능성이 생긴다. 계산 방식에 따라 보면, 우주의 전체 에너지 합은 '0'에 가까울 수 있다.
이 생각은 관측 결과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플랑크 위성(Planck Satellite)은 우주의 전체적인 기하 구조, 즉 우주의 곡률(curvature)을 정밀하게 측정했다. 그 결과, 우주는 거의 완벽하게 평평한 상태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우주에서는 물질이 가진 '양의 에너지'와 '중력'의 '음의 에너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 전체 에너지의 합이 '0'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는 우주가 시작될 때 어떤 외부적인 에너지 투입도 필요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강하게 지지한다. 이 때문에 앨런 구스는 우주를 두고 '진정한 의미의 공짜 점심'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왜 우주는 빛과 에너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고 있을까.
초기 우주에서는 '에너지'가 '입자'와 '반입자'(antiparticle) 쌍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리 법칙에 따르면, '입자'가 하나 만들어질 때 그에 대응하는 '반입자'도 함께 만들어진다. 만약 이 둘의 양이 정확히 같았다면,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만나 모두 소멸하고 에너지만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우주는 거의 전적으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반물질은 극히 드물다.
이 현상을 물리학에서는 '바리온 비대칭성'(baryon asymmetry) 문제라고 부른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소련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1921–1989)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물질의 수가 완전히 보존되지 않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둘째, 자연이 물질과 반물질을 완전히 똑같이 대하지 않는 미세한 차이가 존재해야 하며, 셋째, 우주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가 있어 평형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은 이후 수십 년 간의 입자 물리 실험을 통해 하나씩 확인되고 있다. 특히 유럽의 대형 입자 가속기 실험에서는 '물질'과 '반물질'이 아주 미세하게 다른 방식으로 붕괴한다는 사실이 관측되었다. 이 작은 차이가 초기 우주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누적되면서 모든 물질이 소멸하지 않고 일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물질이 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지금의 우주가 곧바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별과 은하 그리고 행성과 같은 구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입자들이 '질량'(mass)을 가져야 한다. '질량'이 없다면 입자들은 항상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서로를 붙잡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한 중요한 사건이 바로 '전기약 상전이'(electroweak phase transition)다.
'전기약 상전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힉스 장'(Higgs field)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힉스 장'은 특정한 입자 하나가 아니라,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물리적 장이다. 초기의 매우 뜨거운 우주에서는 이 장이 뚜렷한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우주가 식어 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공간 전체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힉스 장과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은 움직이는 데 저항을 받게 되었고, 그 저항이 바로 우리가 '질량'이라고 부르는 성질로 나타난다.
우주가 팽창하며 점점 식어 가던 과정에서, 특정한 온도 아래로 내려가자 우주 전체에 힉스 장이 응축되었다. 이때 입자들은 힉스 장과 상호작용하면서 질량을 얻게 되었다. 질량을 얻은 입자들은 더 이상 빛처럼 흩어지지 않고, 서로 끌어당길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원자와 분자가 만들어졌고, 물질은 모여 별과 은하 같은 복잡한 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주의 존재는 하나의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물리적 과정이 차례로 이어진 결과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무의 불안정성에서 출발해, 에너지의 균형, 물질의 잔존 그리고 질량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는 자연 법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단계에서도 특별한 예외나 초자연적인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
정리하자면, 우주는 무언가를 희생하여 만들어진 존재라기보다 에너지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전개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제로 에너지 우주 가설과 바리온 비대칭성 그리고 질량 형성 이론이 함께 그려내는 그림이다.
다음 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이 우주는 지금과 같은 물리 상수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이 우주를 관측하고 질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는 다중우주(multiverse)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를 통해 접근하게 될 문제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 신난 일꾼)
